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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지속적인 성장

타인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두 가지 - ‘인식의 사각지대’와 ‘지식의 저주’

by 한발자국앞으로 2022. 9. 30.

이해와 공감의 어려움

우리는 종종 타인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공감이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타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 타인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실패하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양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이유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면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의 눈높이에 맞춰주지 않았다거나 상대방의 표현력이 이해를 구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예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오해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이 늘 타인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도 있듯이,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기도 하고, 이해력이 부족하려 상대방의 표현을 잘 알아듣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때론 학습으로, 또 때론 태도의 변화로 이해를 추구해볼 수 있습니다.

근데, 상대방이 충분히 잘 설명하고, 우리도 충분한 이해력을 갖추고 있으며, 태도도 좋다면 타인과 나 사이에는 늘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를 막는 두 가지 장애물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아니 이걸 그렇게 생각한다고?’ 혹은 ‘이걸 모른다고?’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이런 상황이 꼭 상대방의 표현력이나 이해력 혹은 우리의 표현력이나 이해력의 결여로 발생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대화할 용의가 충분할 때에도 종종 오해의 늪에 빠지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인식의 사각지대’를 마주했거나 ‘지식의 저주’에 걸렸을 수 있습니다.

인식의 사각지대

운전을 해본 적이 있다면, 사각지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방위로 확인했고, 안전하다고 느낀 순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다른 차량이나 아이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을 것만 같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피하고 나면, 사이드 미러만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각지대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물론,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여전히 그 사각지대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요.

전설적인 투자자인 레이 달리오는 책 ‘원칙(principles)’에서 우리의 인식에도 사각지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사각지대가 어떤 곳에 있는지, 무엇을 인식하지 못하는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인식의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좀처럼 시각 정보를 인지하지 못하곤 합니다. 어떤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이 지나가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고, 늘 다니는 거리에 어떤 상점이 있는지, 그것이 다른 어떤 가게로 바뀌었는지를 깨닫는 것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이렇게 인식의 사각지대는 실제 감각의 인지에서도 드러날 수 있지만, 우리의 사고 과정에서도 더 도드라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런 사각지대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순간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사실 혼자 하는 사고 과정 속에서는 사각지대를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각지대인 것인데,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 내가 어떤 부분을 못 보고 있는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타인이 개입하면 인식의 차이만큼 내가 지각하지 못하는 혹은, 도무지 상대방에게 설명할 수 없는 간극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부분이 그 혹은 나의 인식의 사각지대인 것입니다.

 

지식의 저주

인식의 사각지대는 우리의 인식 체계에 아예 공백인 개념을 타인이 제시하는 순간 드러나는 장애물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상대방과 같은 영역에서 이야기할 수 있음에도 같은 층위에서 이야기하지 못하는 지식의 저주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식의 저주는 쉽게 설명하면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기억 못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에게 이미 체화된 지식이나 정보를 남들도 거의 비슷하게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로 전문가에게서 많이 보이는 모습인데, 여기서 말하는 전문가를 굳이 직업적 전문가로 한정 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분야의 덕후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 분야에서만 쓰이는 용어로 소통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식의 사각지대를 마주할 땐, 상대방이 말하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아리송한 느낌이 든다면, 지식의 저주에 빠진 사람을 마주할 땐, 상대방이 너무 어렵게 이야기한다거나, 혹은 내 이야기를 상대방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게 의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식의 사각지대에 비해 지식의 격차는 파악하기 쉬워, 이를 인식하게 되면 누구나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을 쉽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격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런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 앞에 서면 막막하기만 합니다. 특히, 잘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불현듯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 혹은 이해받고 싶은데 상대방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해 곤란한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진다면, 이야기를 덧댈수록 소통은 수렁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현재의 간극이 어떤 이유로 발생하는지 확인하기

그런 상황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서로의 생각이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야기가 어긋난 지점으로 돌아가 찬찬히 들여다보며, 오해가 지식의 저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이는, 지식의 저주로 인한 오해가 인식의 사각지대에 비해 파악하기가 수월하고, 노력을 통해 극복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중학생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기 - 지식의 저주인 경우

오해가 그저 앎의 눈높이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그 영역에 더 익숙한 사람이 눈높이를 낮추는 노력을 통해 상호 간의 이해를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기준은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가 아니라 '이 분야를 전혀 모르는 중학생이 들어도 이해할 수 있겠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이미 익숙한 것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을 간과하곤 합니다.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익숙해졌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거나, 너무 자명해 보이는 것이죠.

 

한 분야에 오래 종사한 분들이나, 특정 활동을 오래 한 분들이, 해당 분야 밖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그 분야에서만 통용되는 개념과 용어를 일상어처럼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쓰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우리 대부분은 어떤 특정 분야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소통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더 나은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내가 사용하는 어휘나 개념이 중학생이 들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롭게 하던 것을 의식적으로 살펴본다는 것이 처음에는 낯설 수 있지만, 익숙해진다면, 훨씬 나은 소통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식의 저주에 대해 안테나를 꼿꼿이 세우고 있으면, 나의 언어도 변화시킬 수 있지만,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도움이 됩니다. 상대방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데, 그것이 상대방이 지식의 저주에 빠져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면, 조금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달라고 요청하거나, 자신이 소화한 내용을 되물어서 확인하는 방식을 통해 상대방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볼 수 있습니다.

 

질문하고 수용하기 - 인식의 사각지대인 경우

우리가 인식의 사각지대를 마주한다면, 이는 일단 좋은 신호입니다. 나의 세계가 확장될 수 있는 기회를 마주했다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사각지대를 한 번에 없애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해보되, 도무지 인식을 확장할 수 없다면, 그런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습니다.

 

완전히 이해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온전한 수용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각도로 질문을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소화한 만큼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하여 질문함으로써, 상대방의 생각과 인식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분해하여 수용하는 것입니다.

 

코끼리를 본 적 없는 나에게 상대방이 코끼리를 설명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 이미 알고 있는 돼지를 가져다가 '몸 크기가 집채만 하고, 피부색은 진한 회색인데, 코가 밧줄처럼 바닥까지 늘어져있는 돼지'와 같이 자신만의 언어로 개념을 재구성하고, 상대방에게 확인받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인식의 차이를 좁힐 수 있습니다.

 

이해를 위한 노력의 필요

혼자 있을 때는 좀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가 타인을 마주하는 순간 또렷해지곤 합니다. 한 사람을 마주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세계를 마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끔 타인을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상대방도 나와 같은 세계에 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믿음은 조금의 오해 앞에서도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결국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고, 그저 조금 유사해 보이는 측면, 혹은 조금 겹치는 모습이 있었던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해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도 문제가 없을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해를 가로막는 두 장애물에 번번이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 대한 이해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산다면, 아주 비좁은 방 안에서 혼자 지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기대는 조금 내려놓고, 우리를 막아서는 장애물을 마주하며, 조금 더 현명하게 그것을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위한 노력을 더해갈 때, 더 나은 소통과 공감이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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